봄이 막 계절의 문턱을 넘어서려는 때. 낮의 따스함이 아직은 이른 저녁의 공기 속에 머물러 있었고, 세상 모든 것이 어딘가로 기울어져 가는 때에, 당신은 익숙하고도 그리운 이에게서 온 소포를 받는다. ― 눈대중으로 미루어 보아 10인치 남짓이 되는 ―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종이 상자가 당신의 두 팔에 적당히 안긴다.
당신에게 있어 낯설지 않은 일이다. 지금 걸치고 있는 코트를 시작으로, 그는 제 소식을 전할 때면 반드시 선물을 함께 보내곤 한다. 여기에 구태여, 라는 물음이 들지 않았다면 분명 거짓말이겠으나, 마음이란건 참으로 묘한 방향으로 동하는 법이라 받지 않아도 될 것들이 가슴 깊은 곳을 간질일 때가 있다. 당신은 이 일렁임을 외면하지 않는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감정들을 퍽 기꺼워하며, 당신은 상자를 연다.
상자 안에는 사탕 봉지 몇 개가 작은 균열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완충재로 꼼꼼히 감싸인 채 놓여있다. 그 아래로 누르스름한 표지의 책 한 권, 갈색 봉투 하나, 그리고 손바닥을 겨우 가릴 만한 길이의 흰 봉투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당신은 곧장 그 흰 봉투를 알아본다.
어떤 구겨짐도 없는 새하얀 봉투는 당신이 언젠가 형제의 손을 따라 방문했던 양장점의 선반 위 잘 다려져 선명한 각이 잡힌 셔츠들을 닮아 있다. 기억을 더듬기를, 어느 책에서 ‘세상에는 자신을 함부로 구기지 않는 것들이 있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보기에 이 봉투는 두말할 것도 없이 그런 종류다. 귀퉁이에는 정갈한 필기체로 '사랑하는 에밀(Dearest Emil)' 이라 적혀 있었는데, 미처 마르지 못한 잉크가 종이에 번진 자국이 없었더라면 그것이 인쇄된 글자인 줄 알았을 것이다.
당신은 커터칼을 들어 봉투가 망가지지 않도록 모서리를 조심스레 잘라낸다. 종이가 날에 베이는 소리와 함께, 한때 그가 레터나이프를 쓰던 것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봉투만큼이나 깔끔히 접힌 두 장의 편지지 뒷면으로 펜 자국이 희끗하게 비쳐 보인다. 그 자국을 바라보는 당신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천천히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이것은 젊은 날, 그와의 점심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던 때의 기대감이다. 만물은 흘러가고, 사람은 잃어간다고 한다지만, 기대만큼은 끝내 앗아가지 못하리라.
작은 요철을 남긴 펜 자국은 그 시절, 멀리서 다가오던 그의 그림자 같다. 음영은 점차 가까워지고, 이제 이 편지지를 펼쳐 다가온 이를 만나는 것만이 남았다. 설렘을 품은 당신은 그 단정한 글씨들을 읽어내리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에밀,
네게 편지를 쓸 때면 첫 문장을 앞에 두고 늘 잠깐 멈추게 돼. 난 평생을 펜과 함께 지내왔고, 글을 쓰는 일이란 내게 제일 편한 것 중 하나가 되었어. 그런데도 에밀, 네게 닿을 말이라면 그 어떤 것도 함부로 고르고 싶지 않아서 생각이 길어지고 말아. 아무리 짧은 안부 편지라도 말이야. 네가 이 편지를 한 번만 읽고 넘기지 않을 거라는 걸 형은 알고 있거든.
어떤 이야기를 먼저 꺼내면 좋을까 고민하면서 네가 보내온 편지들을 다시 꺼내 읽어보았어. 읽다 보니, 우리가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은 지도 어느새 몇 해가 지났구나. 전화로 목소리를 듣는 것도 물론 좋지만, 종이 위에서 만나는 일에는 그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어. 생각해보면, 네 편지가 오는 날도, 내가 네게 보낼 편지를 쓰는 날도 거의 언제나 특별한 날들이었지. 이제 우리 사이에서 편지란, 그런 특별함을 전하는 매개가 된 것 같아. 그러니 네게 전할 '특별한' 문장을 고르는 일은 내게 아주 중요한 일이야. 형으로서 네게 제일 좋은 것만 내밀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고. 내가 책상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고 걱정하지는 마. 그 모든 고민과 첨삭의 과정도 내겐 행복한 시간이니까.
네게 정말 전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지만 아직은 포장해두도록 하자. 어릴 적에 기억나? 크리스마스 이브 밤이면, 어머니와 아버지, 혹은 고모님과 고모부님이 거실 한구석 옅게 빛을 내는 전구를 두른 트리 아래에 색색의 포장지로 싸인 선물들을 미리 놓아두시곤 했어. 그러면 너는 꼭 목이 마르다는 핑계를 대고 몰래 계단 아래로 내려가 거실을 엿보고 돌아와서는, 선물들이 어떻게 포장되어 있었는지, 크기는 얼마나 되었는지 내게 전부 속삭여주었지. 그러면 우리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한참을 재잘거리다 잠들고는 했어.
그게 참 좋았다고, 매번 생각해. 기대는 사람을 나아가게 만들어. 그 끝이 언제나 기쁨으로 맺어지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이제 알 만큼은 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아니 분명 알기 때문에, 기대라는 건 정말 아름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어. 상처를 앎에도 아직 오지 않은 것을 향해 가슴을 열어두는 것, 그 안엔 사람을 사람으로 살게 하는 가장 깊은 생명력이 깃들어 있지. 너도 지금 무언가를 기대하며 지내고 있을까. 내가 그 곳을 떠나온 후로, 길을 걷다가 문득 너를 떠올릴 때면, 그게 궁금해지곤 해.
이렇게 거창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었는데 말야. 그러니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해. 내 이야기를, 조금만 더 기다려주었으면 해. 기분 좋은 기대를 안고서 말이야. 이제 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잖아.
당신은 잠시 편지를 내려놓고 갈색 봉투를 뒤적인다. 약간 두께가 있던 봉투 안에서는 사진 십여 장이 쏟아져 나온다. 그 사이에는 동물병원을 배경으로, 고깔모자를 반으로 가른 듯한 깔대기를 쓰고 누워있거나, 집안을 어슬렁 돌아다니는 회색 고양이의 사진이 몇 장 섞여 있다. 그 사진 뒷면에는 정갈한 필기체로 적힌 글자가 보인다. '뢰베(Loewe)'. 당신은 그것이 그가 이 고양이에게 붙여준 이름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정말 그답다고, 그런 생각이 든다.
사탕은 깨지지 않고 잘 갔어? 변변찮은 것을 보내게 되어 마음이 조금 무겁네. 이번 달은 평소보다 지갑을 좀 더 열어야 할 일이 생겼거든. 지난번에 말했던 그 길고양이 말이야. 역시 눈에 밟혀서, 결국엔 데려오고 말았지. 이름은 뢰베라고 지었어. 독일어로 사자라는 뜻이야. 색은 전혀 사자같지 않지만, 언젠가 고양이를 곁에 두게 된다면 꼭 이런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거든. 어쨌든 이 어린 사자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많은 지출이 생겨버렸고, 이번엔 다소 소박한 선물들을 보내게 됐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말고, 지부 사람들과 사이좋게 나눠먹었으면 해. 지부장실의 양철통이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좋겠다.
그리 멀지 않은 때에 목소리를 나눴는데도, 이렇게 다시 편지를 보낸 게 네겐 조금 어리둥절하지 않았을까 싶네. 하지만 이 한 달간, 마음을 맴도는 문장들이 참 많았어. 목소리로는 분명 다 전하지 못할 말들이라 결국 펜을 들고 말았지. 이번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책 한 권과 내가 이 무렵 겪은 일에서 비롯됐어. 최근 받은 어떤 질문 덕분에, 그 책의 내용과 나의 삶이 비로소 맞물리게 된 것 같은 흥미로운 경험을 했거든. 어쩌면 뜻밖의 책 추천사가 될지도 모르겠네. 너에겐 지루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내 편지를 읽으면서 조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재미있게 써볼게.
2주 전의 일이야. 두 달에 한 번씩, 이른 오후면 내 보호관찰을 맡은 젊은 친구가 찾아온다는 건 너도 잘 알 거야. ― 지금은 네게 처음 그의 이야기를 했던 때보다 훨씬 친해졌지. 술이 있으면 누구와든 죽마고우가 될 수 있는 법이거든 ― 여느 때처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그가 내게 묻더구나. UGN을 등진 그날, 무엇을 심정이었느냐고. 후련했는지, 고통스러웠는지, 자신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 같다면서.
그 질문에 지나간 시간을 더듬어봤어. 알다시피, 나는 그때의 감정을 오랫동안 어떤 상쾌함이라 여겨왔지.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방의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을 때, 밖에서 불어오는 첫 바람이 평생을 묵혀두었던 먼지와 함께 오래된 걱정들을 한꺼번에 쓸어내주었을 때의 기분 말이야. 나는 그것을 해방이라고 굳게 믿었어. 하지만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하려는 순간, 어떤 문장이 내 심장을 푹 찌르고 선명해지더구나.
“이 모든 일은 너희가 계속 괴로움으로부터 달아나려 하기 때문이다. 너희 자신으로부터, 너희 영혼으로부터 달아나려 하기 때문이다.”
헤세는 『차라투스트라의 귀환』에서 우리의 고통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나려는 데서 온다고, 영혼이 부르는 소리에 귀를 막고 더 그럴듯한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려 제 것인 양 웅얼거리는 데서 온다고 말했지. 이전의 나는 그 말을 마음 깊이 들이지 않았어. 그렇게 기억의 저편에서 흐릿해지도록, 나는 그것을 조용히 방치해두었지. 그랬던 만큼, 질문에 답하려는 순간 그 문장이 불현듯 선명해진 것은 우연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어. '운명'이라고 느껴졌지. 내 안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것이, 마침내 제 때를 만나 날개를 편 것처럼. 신기하지 않아?
그래. 그 시절의 나는 분명 고통스러웠을 거야. 너로부터 도망친 나는 그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였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으니, 그 괴로움도 달콤하게만 느껴졌지. 하지만 그건 내 안에서 지저귀던 소리를 따르는 대신, 바깥에서 더 '논리적인' 소리를 찾아다닌 것에 불과했어. 온갖 곳에서 긁어모은 말들에 자신을 끼워 맞추고, 글로 멋지게 다듬어진 얼굴을 덮어쓰는 것으로 나를 삼았지. 도망을 그럴듯한 논리로 포장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이라고, 몇 번이고 스스로를 타일렀고.
결국 전부 내 안에 있던 거야. 나는 나를 알기 위해 거울을 들여다보았지만, 정작 내 얼굴은 한 번도 매만지지 않았지. 그 허깨비 같은 반사상을 바라보며, 거울을 통해, 그리고 우리 서로를 통해서만 자신을 정의하려 했던 끝이 어땠는지는 모두 알고 있어. 맞아, 정의는 밖에서 빌려올 수 없어. 그건 내 안에서, 오직 나 스스로만이 내려야 하는 일이야. 그 단순한 진실 하나를 깨닫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어. 그리고 그걸 이제야 글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이 깨달았다는 게 기쁜 건지 씁쓸한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네. 하지만 에밀, 진짜 자신으로 서기 위해 걸어가는 길이 내 심장을 뛰게 한다는 것만은 정말이야. 크리스마스 이브의 설렘을 나는 늘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어.
찬찬히 문장을 정리한 후에 ― 술이 들어가서인지 생각만큼 말이 잘 나오지는 않더라 ― 그 친구에게도 이런 이야기들을 해주었지. 흥미롭다는 듯 귀를 기울이다가도, 취기가 올라서인지 이따금 눈이 풀리더구나. 그래도 그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어. 배신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고, 나는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사람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관점을 존중하고 존경한다고. 그러니 이렇게 나와 시간을 보낸 것도 헛된 일은 아니었다고. 발갛게 취한 얼굴이었어도, 그 눈빛만은 정말 또렷하더구나. 이 편지를 쓰는 지금까지도 그 얼굴이 선해. 그 눈을 보니 내 진심이 그에게 닿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너도 책을 한 두 권씩 읽어보고 있다고 했지. 내가 읽었던 책을 함께 담아 보낼게. 제일 쉽게 구할 수 있는 역본이었어. 시간이 충분했다면 내가 원서를 직접 번역해 줄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서재 안에서 먼지만 마시고 있기에는 요새 날이 너무 좋잖아. 네가 직접 읽고 느껴주었으면 하는 단락들은 큰 어긋남 없이 번역되었으니, 같은 문장을 읽을 수 있을 거야. 나와 같은 것을 느끼려 할 필요는 없어. 적어도 이것으로 우리는 같은 세계를 접할 테니까. 우리가 이 책에 대해 즐거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겐 큰 행운이야.
막 햇볕이 노르스름해질 때 펜을 들었는데, 어느새 날이 저물어 창가가 뿌옇게 물들었어. 스탠드를 조금 이르게 켜 두었는데, 잘한 일 같아. 이제 정말 여름이 오려나 봐. 공기에 벌써 열기가 돌고 있어. 여기도 꽤 따뜻해진 걸 보니 그쪽은 벌써 꽃이 다 지고 많이 더워졌겠다. 넌 더위를 많이 타니까 괜히 마음이 쓰이네. 물은 꼭 자주 챙겨마시고, 무리하지 마. 또 편지 쓸게.
에릭이.
편지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당신은 그가 보낸 책의 표지 위로 손을 얹는다. 손끝 아래 닿는 종이의 감촉이 썩 익숙하다.
창 너머로 햇빛이 거두어지며 흐릿한 붉은 빛이 흘러들어온다. 하늘은 서둘러 커튼을 걷지 않는다. 느긋이 저물어가는 하늘이 두 곳을 동시에 덮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문득 떠올린다. 지금 이 식탁 앞에도, 그리고 그가 살아가는 어딘가의 낯선 거리 위에도 똑같은 땅거미가 스며들고 있겠지. 당신은 식탁 위의 작은 조명을 켠다. 불빛은 좁고 따뜻한 것이, 꼭 어릴 적 형제의 손을 잡았을 때의 온기를 닮았다.
어스름 속에서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치면, 희미하게 가라앉은 활자들이 보인다. 그도 이 문장들을 읽었을 것이다. 이 단락에 잠시 머물렀을 것이다. 어쩌면, 이 대목에서 잠시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당신은 천천히 걸어나간다. 기대를 품으며, 그가 한 번 들렀던 세계로.